발간사


 인터넷전노협백서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발간위원회에서

   제작한 내용을 기초로 김종배추모사업회와 LISO에서 제작하였습니다.


 

 발간사

1990년 1월 22일, 창립되기 전부터 이미 ‘전노협’이라고 불리웠던 노동운동의 강철대오,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출범하였다. 그 날 서울 일대에는 갑호 비상령이 떨어졌고 출범 자체를 봉쇄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엄중한 검문과 검색이 진행되었다. 날씨마저 영하로 떨어졌고 흰 눈발이 간간이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지역과 업종을 가로질러 ‘전노협’ 깃발을 향해 주저없이 달려 오고 있었다. 마침내 그 깃발은 수원 성균관대학교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천만 노동자들은 외쳤다.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자본가들과 부르조아 언론에서는 전노협이 결성됨으로써 마치 경제가 박살나고 세상이라도 무너질 듯이 호들갑을 떨었으며, 노동자들을 압살해 왔던 군부세력은 노태우를 앞장 세워 ‘보수 3당 합당’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로부터 만 7년이 지난 지금, 그 3당 야합으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군부파시스트와 야합한 ‘태생적 한계’를 넘지 못한 채 부패하고 퇴락한 정권으로 온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으며, 경제까지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반면 1990년대 전반부를 전노협과 함께 해 온 일천 이백만 노동자들은 1996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건설하였고, 1996년 말부터1997년 초에는 김영삼의 노동법 날치기에 맞서 강력한 총파업을 전개함으로써 권력의 오만함을 확실히 응징하며 이 나라 민주발전의 진정한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힘은 과연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돌이켜 보건대, 1970년대 노동자들은 유신체제라는 강압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전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하에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강요당했고, 외세 의존적인 경제발전의 결과, 독점재벌만 양성되었다. 1980년 새롭게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저항을 폭력으로 짖눌렀다. 이러한 전두환 군부파쇼에 대한 민중들의 투쟁은 크게 두 세력이 주도하였다.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두환정권 하의 엄혹했던 시기에는, 청년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위장취업’이라는 악독한 누명을 쓰면서도 노동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 어느 하루라도 공장과 대학에서 저항하지 않고, 싸우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무수한 독재정권의 희생자들, 저항하다 산화한 열사들과 함께 마침내 19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일어섰던 것이다.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방방곡곡, 도시와 대학, 공장과 사무실, 탄광과 농촌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 학생, 민주인사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반파쇼 민주화대투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61년부터 자그마치 2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지속된 군부독재 지배체제의 굴레를 벗어내는 대중투쟁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마침내 노동자들도 자신의 힘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아가 노동조합의 한계 또한 절실하게 느껴 전국적 차원의 민주적이고 강고한 노동조합 조직을 만들지 않고서는 노동자의 권리, 민중의 권익과 기본권을 확보하거나 지켜낼 수도 없음을, 그리고 이 나라를 악독한 파쇼지배로부터 건져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은 곧 전국 차원의 강력한 민주적 노동조합 조직 건설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지역, 업종별로 노동조합협의회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 최루탄 없이, 전투경찰과 구사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없이, 수배와 구속, 징역살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 있을까? 집시법, 국가보안법,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의 악법이 난무했고, 심지어는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과 몇 푼되지 않는 재산마저 압류하여 길바닥에 나앉게 하는 악독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런 마당에 어찌 정권과 자본에 타협적인 자세를 꿈꿀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가장 비타협적이고 또한 전투적인 노동자들의 전국적 연대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건설되었던 것이다.‘전노협’은 노동자들만의 희망이 아니었다. 모든 고통받는 민중들의 희망이었다. ‘국민연합’으로 모인 민중세력은 ‘전노협’의 든든한 울타리였고, ‘전노협’은 그 곳의 기둥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전노협에 대하여 자본과 정권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전노협 출범 5개월 사이에 100여 명이 구속되고 200여 명이 고소고발 당했으며, 100여 명이 수배당했고 전노협 사업장에 대한 경찰투입이 18번 씩이나 되풀이 되었다. 전노협 건설을 주도한 단병호 위원장은 ‘전노협’ 역사의 절반 이상을 옥중에서 보냈고, 역대 위원장, 직무대행, 임원, 중앙위원들 또한 모두 한 번 이상 씩 투옥되었다. 1992년에는 중앙위원 전원이 연행되어 비상중앙위원회를 중부경찰서에서 열기까지 하였다. 지역 사무처와 중앙 사무총국의 동지들은 아침에 우유·신문배달, 세차는 물론이요 휴일에 공사판 막노동을 하면서 그 모든 탄압을 이겨나갔다.

자본가들은 ‘전노협’에 맞서기 위해 기존의 단체와는 별도로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조직하여 노동자탄압을 위한 악랄한 정책을 개발하고 전노협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었다. 전노협을 사수하기 위한 역사적인 ‘메이데이 총파업’, ‘노동절’, ‘전국노동자대회’는 이 투쟁의 한가운데서 역사적으로 복원되었다.

전노협을 사수한 박창수 열사를 비롯해 처절하게 싸워 온 ‘전노협’ 동지 가운데 어느 누가 ‘전노협’을 해산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더욱 더 강력한 민주노조운동의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새로운 세상과 노동해방을 열어나가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민주노조를 지켜냈던 전노협 6년의 헌신성으로, 아니 그 오랜 투쟁의 열정으로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함으로써 바로 오늘의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1995년 12월 3일 마침내 지난 역사적 성과를 모두 민주노총으로 이관하며, 해산대의원대회 참가자들의 오열 속에서 피와 사랑과 눈물로 가득한 전노협 깃발은 내려졌다.

전노협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를 통해 지난 전노협의 투쟁과 활동을 백서와 운동사로 나누어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전노협 청산위원회’로 하여금 전노협의 모든 자료와 자산을 ‘전노협 백서·운동사 발간위원회’로 넘겨 백서발간 사업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전노협’이야말로 지난 엄혹한 시절 노동운동의 대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 점 허술함이 없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물인 이 ‘백서’를 ‘전노협’ 동지들의 뜨거운 열망을 담아 발간하는 바이다.

전노협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열망과 헌신성은 있어도 재정이 넉넉하게 뒷받침되지 못했다. 발간팀의 열성과 헌신, 전노협의 빛나는 투쟁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기꺼이 참여한 수백명의 자원봉사들에 의해 부족하나마 백서출간이 가능할 수 있었다.

특히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아온 ‘전노협’으로서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할 수 없었고, 지역노조협의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자료들이 유실되거나 제대로 모아지지 못해 그간 치열하게 싸워왔던 동지들의 헌신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데 대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자료를 남기면서도 이 탄압을 받고 저항해 싸우는 사이에 자료도 많이 유실되고 잘 수합되어 있지도 못하여 운동의 치열함과 동지들의 헌신성을 한껏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 이러한 점들이 보완되고, 나아가 운동사가 발간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끝으로 그간 전노협을 지켜온 조합원들, 자문위원, 고문, 그리고 전노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전노협 후원회, 법정투쟁을 지원해준 변호사, 의료혜택을 베풀어 준 약사, 의사, 언제나 전노협을 위해 투쟁의 전선에 함께 했던 노동단체, 청년학생들, 노래, 미술, 영상 등 문예팀, 연구소 등에 동지애를 보낸다. 이 모두가 전노협의 역사와 함께 빛 날 것이다.

그리고 이 백서는 영원한 노동자들의 동지인 전태일, 박창수 열사를 비롯한 노동열사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민주열사들, 전노협과 연대해 주신 모든 분께 정중하게 바치는 바이다.

1997년 4월 4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발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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